고구려가 삼국을 통일을 시키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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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삼국을 통일을 시키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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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시기(391~412년대 쯤)

이 시기는 순수하게 군사적인 면만 따지면 백제, 신라를 압도했던 시기.

(여기서 말하는 군사적인 면은 원정을 가서 박살낼 수 있느냐)

신라는 내물 마립간(350년대 쯤 즉위) 시기 이제야 좀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나라꼴을 갖춘 상대적 후진국이었고

고구려의 영향이 깊게 박힌데다

고구려가 원군을 파견해 백제-왜-가야 연합군을 물리쳐준 400년대 이후로는

내물 마립간이 직접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실상 속국이 되는 나라.

백제는 많이들 알다시피 백제 ‘아신왕’ 을 수차레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누르고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대왕 앞에 항복해서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까지 했으니,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눌러버렸던 상황.

즉 백제와 신라를 군사적으로 누르는것만 따지면 충분히 가능했던 시기.

그러면 광개토대왕 시기에 삼국통일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나?

그러나 이떄는 주변 환경이 너무 까다로움.

일단 이 시기는 후연과 치열하게 다툼을 하던 시기라는 점.

1. 고구려가 백제 아신왕에게 ‘노객선언’ 을 듣고 멸망 시키려면 시킬수도 있었던 년도가 396년.

2. 그러나 397년에는 요동에서 후연과 각축전을 펼치고

3. 398년에는 또 숙신 등 주변 정리

4. 400년에는 백제-왜-가야 연합군 때문에 신라에 전운이 감돌며 고구려가 남쪽에 집중하는 사이

후연이 뒤통수를 치고 들어와 신성, 남소성이 무너지고 700여리가 넘어갔지만

양면전선이 되니 고구려는 당장은 대응할수가 없었고

일단 급한대로 먼저 신라로 진군해 남쪽 문제를 해결한 뒤

5. 402년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

6. 이렇게 북쪽에 신경을 쓰니 404년에 또 백제가 가야, 왜와 함께 공격해와서 이를 격퇴하고

7. 이해에 후연과 재차 군사적 분쟁이 생기고,

8. 405년에는 후연의 모용희가 군사를 이끌고 와 요동성이 넘어갈뻔까지 했지만 지켜내긴 했으며,

비슷한 시기 목저성 공격 역시 방어.

9. 한편 이 무렵 고구려에는 기근이 발생하느라 전쟁 기록은 끊기고 아마도 수습에 치중했던듯 하며,

10. 407년 후연으로 추정(기록상 주체가 확실하지 않음)되는 적을 격파,

여기까지 해서 후연하고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은 거진 마무리 되지만

11. 또 410년에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동부여’ 정벌전이 있었고

이런 일까지 끝나고 중간중간 내치 좀 신경을 쓰려니까 412년 광개토대왕이 사망함

즉 이 당시는 고구려가 군사를 파견해서 백제를 물리칠 수는 있긴 해도,

진득하니 주둔해서 반발세력을 다 누르고 통치력을 갖추고 할 여유가 나질 않았음.

국경 지대의 영토를 좀 더 빼앗아올 수는 있어도 나라를 통째로 영역화 할 수는 없는 상황.

물론 이미 396년 전쟁때 아신왕 및 백제 지도부 쓸어버리려면 쓸어버릴 수도 있었으나,

백제 정도 나라면 단순히 지금 왕 죽인다고 해도 끝나는게 아니라 한참 뒤에도 부흥군 등이 일어날만 하니

왕 죽이는 순간 두더지 잡기 게임이 되버리는 상황이라 최종적으로는 시간이 엄청 드는 작업이었는데,

숙신 동부여 같은 주변 정리도 아직 안되었고 최대의 적인 후연등이 눈알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쪽에 전력을 낭비할 수도 없었음.

일단 고구려는 항복선언까지 받았으니

고구려 입장에선 백제가 왕이 항복까지 하면서 권위도 실추되고 전쟁통에 피해도 크니

최소한 당분간은 군사를 더 못 동원하겠지 싶었을테고

실제로도 백제 아신왕이 이후 군사를 동원하려니까

백제 백성들이 신라 왜 등등으로 사방으로 도망가면서 나라가 개판이 날 지경이었고

정상적인 상황이면 애초에 군사 동원을 하면 안되는 수준이라 항복만 받았던 고구려의 판단 자체가 틀린건 아니었으나

아신왕이 백제 120현의 백성이 나라 밖으로 도망을 치고 있는데도 이악물고 군사를 일으키는 또라이 급이라

(통일신라 말기 현의 갯수가 400개 가까이.

저때 백제보다 큰 통일신라 기준으로 따져도 4분의 1이 넘는 현인데 그 현의 백성이 다 도망치는데도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리)

어거지 수준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가야, 왜까지 끌어들여서 400년 때 신라를 쳤고

고구려군에 진압되었지만

이때는 또 후연이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기세를 몰아 백제를 더 끝낼 정도의 여유가 없었고

404년 아신왕이 또 이악물고 군사를 동원해서 황해도 석성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가다가

또 패배.

그런데 백제가 패배는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마도 한성 방위에 필요한 개성까지의 군사적 요지는 백제가 회복은 좀 한것처럼 보이고

직후에 후연이 요동성 쳐들어올 정도로 반대쪽에 군사적 긴장이 심화된데다 기근까지 있던지라

백제가 평양까지 감히 넘보았음에도 쳐들어온 적을 물리치는 것 이상으론 하지 않음.

즉 남쪽에서 뭐가 좀 터질라 하면 또 위에서는 후연이 오는 상황이라 남쪽에서 오래 뭘 하긴 어려웠음

‘광개토대왕의 남정’ 으로 잘 알려진 신라를 지원해서 백제와 가야를 눌러놓기 위해 했던 싸움도

군사가 남하하려고 준비하는 동안 후연에게 신성, 남소성 및 700여리의 땅이 넘어가는걸 감수해야만 했던 원정

잠시 한반도 남부끝까지 원정 다녀오기만 해도 반대쪽에서는 저 난리가 남.

이 후연 문제는 408년 쯤 되니 일단락 되긴 했지만,

이후에는 410년까지 동부여 정벌 문제가 있었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써진 동부여 항복 규모를 보면 이것도 적당히 준비할 수가 없는 규모의 원정이었음.

동부여를 흡수한 후에는 한동안은 막 흡수한 땅과 세력을 정비하는것만도 바쁠테니 또 시간 내기 어려웠고

이 무렵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412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음.

즉 광개토대왕 시기는 백제, 신라를 압도할 군사력은 있었으나

주변 정리 끝내기만도 바쁜 시기였고

어느정도 바쁜 일은 해결이 되었고 이제야 좀 조용해졌다 싶을 무렵에 왕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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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시기(412년대~491년대)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시기.

주변 여러 부족, 국가들이 어느정도 평정이 선왕때 끝났고

치세 절반 가량은 여전히 신라가 통제 하에 있었으며

중국과의 드잡이도 화북에 북위가 집권하고 북위나 고구려나 서로 크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안취해서 어느정도 안정화된 시점.

특히 460~470년대 이후로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남쪽에 공세를 펼쳤고,

당시 백제나 신라나 모두 굉장히 위협을 느꼈음.

다만 410년대~450년대까지 비교적 좋은 시기가 있었음에도

정작 이때는 백제, 신라에 별다른 군사적 행보를 보이질 않았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추정되는 이유에 대해선 후술.

412년 광개토대왕이 죽고 장수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삼년상에 들어간것으로 보임.

414년에 끝나고 광개토대왕릉비 세웠다는게 중론이고

일이 다 끝나는 시기 생각하면 415년 초에야 끝났을 거라고 보는 의견도 있음.

여하간에 그게 지나서야 제대로된 통치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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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기록이 없다가 427년 수도 평양으로 천도하는 내용이 나옴.

그런데 평양 천도 이후 435년이 될때까지 또 10년 가까이 별다른 없음.

414년~415년 쯤부터 친정 시작한 뒤로 거진 20년간 기록이 사실상 ‘평양 천도’ 말고는

크게 의미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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